‘리얼’이 전복되고 있는 세계를 추동하고 있는 동력은 무엇일까
제닌기
리얼이 전복되는 세계를 추동하는 동력으로의 재귀
컴퓨테이션의 등장 이래 컴퓨터그래픽스 및 여타 수많은 시뮬레이션 기술들은 우리가 현실에서 보는 ‘실제의’ 것들을 디지털 환경에서 최대한 가까이 모방하려는 노력을 해왔으며 끝없이 발전해 왔다. 그런데 가장 최근에는 최첨단 인공지능의 역량으로 인해 어떤 특이점에, 즉 불편한 지점에 다다르고 있는 듯하다. 이것은 곧 ‘리얼’의 범주가 전복되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점점 오늘날 시뮬레이션의 밀도는 정점을 향해 가고 있다. 이 필연적인 것처럼 보이는 흐름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일까? ‘리얼이’ 전복되고 있는 이 세계를 추동하고 있는 동력은 무엇일까?
이 동력의 흐름을 이해해 보기 위해 나는 ‘난수 생성’과 ‘재귀적 형태 발생’이라는 테크놀로지 기제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보려 한다. 그동안 컴퓨테이션을 이용한 디자인 및 시각적 이미지 구현의 장에서는 자연의 불규칙성 내지는 자연에서의 속성을 모방하기 위한 기제가 계속해서 개발되어왔다.
그런데 놀랍게도 컴퓨테이션에서 쓰이는 알고리즘과 자연물 사이에는 물리-구조적으로 매우 유사한 지점이 있는데, 바로 그들이 각자 연속체의 일부를 형성한다는 점에서 매우 닮아있다는 점이다.
컴퓨터의 아버지 앨런 튜링(Alan Turing)이 죽기 전 그가 마지막으로 몰두했던 작업은 형태 발생 (morphogenesis)에 관한 연구였다. 형태 발생은 자연(생물 등)에서 창발적인 규칙을 통해 일정한 ‘패턴’이 생성되는, 즉 세포나 조직 및 유기체가 형태를 발달시키는 생물학적 과정을 가리킨다. “형태 발생의 화학적 기초 (The Chemical Basis of Morphogenesis)”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그는 ‘튜링 패턴’이라는 개념을 도입하는데, 동물에서 발견되는 줄무늬나 반점과 같은 패턴이 균질하고 균일한 상태에서 어떻게 자연스럽고 자율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지를 설명한다. 이러한 패턴이 형성되는 지점은 얼룩말이나 복어뿐 아니라 자연의 여러 곳에서 발생하며, 또한 여기에는 어떤 계(system)가 있는데 그것은 특정 패턴 요소를 증폭시키는 ‘되먹임’, 즉 재귀의 과정이다.
튜링 패턴(Turing pattern) 이미지
이 ‘재귀’의 시스템은 다음의 이야기에서도 발견된다. 1975년 브누아 맨델브로(Benoit Mandelbrot)라는 수학자는 자연적으로 발견되는 자가 유사 도형(self-similar shapes)을 표현하기 위해 프랙털(fractal)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냈다. 물리적인 실제 세계에서 우리가 마주치게 되는 많은 것들이 기하학 형태로 표현될 수 있다. 눈송이, 나무들, 해안선과 산들을 떠올릴 수 있겠다. 프랙털은 이런 종류의 자가 유사 도형들(“자가 유사"란 멀리서 보거나 가까이서 보거나 도형이 궁극적으로 동일하게 보이는 것을 의미)을 묘사하며, 이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기하학이 필요하다. 이런 도형들이 생성되는 과정을 재귀(recursion)라고 한다. (“Fractal”, Wikipedia)
이전의 과정을 다시 참조하며 되먹임 하는 반복적인 과정인 재귀는 컴퓨테이션에서 쓰이는 알고리즘이 굉장히 잘 수행하는 시스템이다. 다음의 IT 용어사전을 참고하면 다음과 같다.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의 함수에서 자신을 다시 호출하여 작업을 수행하는 방식. 어떤 루틴이나 프러시저가 자기 자신을 반복 호출하여 문제를 풀어 나가는 알고리즘으로, 이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스택을 사용한다. 간단한 루틴을 풀 수 있는 반면 처리 속도가 느리고, 횟수가 지나치게 많으면 프로그램이 정지하기도 한다." 되부름 [recursion] (IT용어사전, 한국정보통신기술협회)
1978년 컴퓨터그래픽 연구원이었던 로렌 카펜터(Loren Carpenter)는 처음으로 프랙털 기하학을 사용하여 복잡하고 사실적인 인공 풍경을 만들기 시작했다. 먼저 큰 삼각형으로 거친 풍경을 만든 다음 각 삼각형을 작은 삼각형으로 나누고 작은 삼각형을 다시 세분화하여 실제 지형이 나타날 때까지 이 과정을 재귀적으로 반복한다. 카펜터는 이러한 기술을 사용하여 1982년 영화 스타 트렉 II (Star Trek II: The Wrath of Khan)을 위해 완전히 컴퓨터로 생성된 외계 행성 시퀀스를 만들었다. (Reas, McWilliams, LUST, 2010, p.153)
Star Trek II: The Wrath of Khan에서의 프랙털 풍경
자기-참조성 및 재귀성을 넘어 컴퓨터그래픽스는 약간의 임의, 무작위성을 개발해 좀 더 ‘자연’스럽고 ‘리얼’한 이미지를 구현하기 시작한다. 프로그래머 켄 펄린 (Ken Perlin)은 초 난수들이 아주 자연스러운 순서로, “부드럽게" 생성되는 “펄린 노이즈"라는 이름의 함수를 개발했다. 이 역시 1980년대 초의 일이었다. 본래 절차적 텍스처(procedural texture: 구름이나 풍경, 대리석 질감 등 자연적인 요소들의 실제 느낌을 생성하기 위해 알고리즘을 이용하여 컴퓨터로 생성한 이미지)를 생성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펄린은 이 기술로 아카데미 기술상을 받았다. 본래 컴퓨테이션에 의한 난수는 진정한 난수가 아닌 유사 난수이다. 랜덤한 숫자를 출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후 일정한 패턴이 생성된다. 따라서 컴퓨테이션에 의한 랜덤은 진정한 랜덤이 아닌 것이다. 펄린이 개발한 ‘부드러운’ 난수 순서 생성의 핵심 역시 이전 단계의 생성 행위를 참조해 약간의 변이를 더해가는 점진적인 생성 과정에 있다.
여기까지 정리하자면, ‘컴퓨테이션 알고리즘은 생물에서 발견되는 형태 발생의 과정을 매우 잘 따라 할 수 있는 물리적 구조를 타고났다’라는 물리적 현실을 발견할 수 있으며, 이 물리적 현실은 리얼이 전복되고 있는 세계를 추동하는 동력 중 하나로 볼 수 있겠다.
생명을 불어넣은 알고리즘, 건축 디자인에서의 패러다임 전환
20세기 말에서 21세기로 넘어가는 건축 디자인의 역사에서는 컴퓨터가 보조하는, computer-aided 디자인에서 컴퓨테이셔널 디자인 프로세스로 넘어가는 패러다임 변화가 있었다. 이 거대한 전환에 대하여 개괄한 한 책에서 저자들은 다음과 같이 개괄한다.
디자인에서 컴퓨터-지원(computer-aided) 접근 방식은 정보를 상징적 표현으로 캡슐화하는 방법을 가정한다. 대조적으로 컴퓨테이셔널 접근은 특정 데이터가 초기 추상화에서부터 시작해 결국은 실현될 수 있도록 한다. [...] 건축에서 캐드(CAD; Computer-Aided Design)로부터 컴퓨팅 디자인으로의 전환은 디자인 사고와 방법의 중대한 변화를 나타낸다. 재현은 시뮬레이션으로 대체되고 있으며, 물체의 제작은 디자이너가 작성한 컴퓨테이셔널 프로세스를 통해 통합 시스템의 생성으로 이동하고 있다. (Sean Ahlquist and Achim Menges, 2011).
이에 대하여 좀 더 잘 이해하려면, 1990년대에서 2000년대까지 건축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가장 많이 거론되던 단어였던 ‘패러매트릭’ 디자인 과정에 대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위의 논문에 따르면 패러매트릭 디자인은 “‘유전적 속성을 지닌 개체(Geno-type)’가 내,외부적 변수에 따라 ‘고유한 확정성을 지닌 개체(Pheno-type)’로 변화하는 자연계의 원리를 디지털적으로 구현한 것”이며 “자연계에 존재하는 비물질적 에너지를 실체화하는 '코드변환(Transcoding)‘ 과정”이다. (김용학, 안성모, 2018).
이러한 디자인 방식을 통해 복잡하고 방대한 수치가 자동-시각화되고, 자연에서 발견되는 “비정형적이고 점진적인 조형 결과물을 실시간으로 시뮬레이션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디자이너는 초기 알고리즘을 작성하고 이후 도출된 수많은 결과물 중 하나를 선택하는 역할을 한다. “즉, 조형의 방식이 기존의 ‘형태를 만들어내는 방식(Form Making)’에서 ‘형태를 찾아내는 방식(Form Finding)’으로 전환”된 것이다. (김용학, 안성모, 2018).
즉, 기술을 통해 분석되고 다시 재현됨으로써 자연은 틀에 박힌 이미지에서 탈피해 생명, 생물이 환경에 반응하는 에너지로 시각화된다. 또한 디자인 과정에서 디자이너는 무엇인가를 표현하고 구성하는 재현의 주체에서 물러난다. 대신 자율성을 부여받은 알고리즘이 여러 가지 결괏값을 생성한다.
다음의 두 인용문은 위의 디자인 패러다임이 ‘형태’ 및 ‘환경’에 대한 인간의 인식 및 생각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를 보여준다.
컴퓨터 매개변수 모델을 사용하여, 디자이너들은 산호, 해면 및 기타 원시 해양 및 식물 생물이 빛, 해류, 영양분 등과 같은 외부 매개변수에 반응할 때 생산되는 양상과 성능 등을 분석할 수 있었고 이로 인해 그 생물에 대한 정의를 다시 재구성할 수 있게 되었다.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중반을 중심으로 디자이너들은 항공 우주 및 영상 산업을 위해 사용되었던 이 기술들을, 즉 형태학적 시뮬레이션을 건축에 적용하여 '형태에 생명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Phillips, 2019).
건축 디자인 이론에서 컴퓨테이셔널 이론과 기술의 기초가 되는 기본 개념은 ‘형태’가 곧 ‘환경’이라는 것의 보조 구성 요소임을 드러내며, 또한 ‘환경’은 곧 재생과 퇴화의 역동적인 교환에서 이루어지는 에너지의 복잡한 그물임을 보여준다. (Sean Ahlquist and Achim Menges, 2011, p.10)
즉 우리가 사는 환경이라는 것이 교환하는 에너지의 복잡한 망이라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생물과 환경에 대한 재정의 및 재구성이 이루어졌으며, 이것은 ‘형태’의 새로운 시각적 구현, 즉 새로운 디자인 기술의 패러다임 전환으로 인해 가능하게 된 것이다. 또한 이러한 기술을 통해 디자이너가 초반에 작성한 알고리즘은 스스로 자라는 자율성을 갖게 되었고 이것은 인공 생명이라는 상상력이 본격적으로 창발하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컴퓨테이션 ‘바깥’ 세상에서의 노이즈를 빌려와 발전시키는 암호화 산업
최근 이루어지고 있는 난수 발생 (random generator)의 또 다른 행보가 있다. 현재 사이버 보안 혹은 갬블링 산업을 위해 참 난수 발생기가 지속적으로 연구 및 개발되고 있으며, 진정한 난수를 얻기 위해 컴퓨테이션 ‘바깥’의 물리적 세상에서의 노이즈, 즉 불규칙성을 추출한 실험들이 진행되고 있다. 이 불규칙성의 예로는, 전도전자의 열교란 운동에 의한 잡음, 방사능 붕괴 (Radioactive Decay; 放射能崩壞; 방사성 물질이 시간에 따라 방사능 강도가 약해지는 것. 알파, 베타 및 감마 붕괴와 자발이나 핵분열 반응, 핵이성체 변이 따위의 종류가 있다), 단일 광자 광학 프로세스(photon optical processes), 가끔 시계에서의 발견되는 지터(jitter), 브라운 운동 (Brownian motion; 액체 혹은 기체 안에 떠서 움직이는 작은 입자의 불규칙한 운동) 등이 있다 (Ray & Milenkovi, 2018).
암호화 및 도박 산업에서 요구되는 매우 실질적인 수요로 인해 컴퓨테이션이 자연에서의 불규칙성 및 엔트로피성을 다루고 모방하는 능력이 계속해서 발전하고 있다.
언어의 폐기와 발명
우리가 알고 있던 ‘리얼’이 ‘리얼이 아니었던 것’에 의해 전복이 되고 있다면 자연 대 기술과 같은 이분법적인 사고를 피하며 좀 더 세밀한 언어를 만들어내는 노력이 필요하다. 특히 이 글을 쓰는 과정에서 ‘자연’이라는 언어가 우리 머릿속을 복잡하게 하는 매우 문제적인 단어가 되고 있음을 발견했다. 따라서 이를 계속해서 다른 언어로 대체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오늘날 모종의 특이점을 만들어내고 있는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복합적이고 총체적인 정리를 시도했다.
1) 자기-참조적, 재귀적인 점진성을 중심으로 생물과
컴퓨테이션 알고리즘 사이 물리적 유사성:
이 때문에 서로 닮기 쉬운 물리적 현실이 한 축을 이룬다.
2) 이 물리적 현실에 힘입어 개발된 새로운 조형 언어 및
시각성으로 인한 문화적 상상력, 그리고 철학적 동향:
컴퓨테이셔널 디자인, 형태 생성 디자인 방법론의 발전을 통해
환경, 자연, 형태에 대한 인식 및 태도가
진일보하게 된 지점이 있었다.
3) 인간 사회 산업에서의 세속적 의도들;
컴퓨터그래픽 산업에서는 ‘몰입’을 위해 테크놀로지의
실사 모방이 중요한 것이었다면,
암호화 및 도박 산업에서는 컴퓨테이션
바깥 환경에서의 엔트로피를 빌려와
‘참 난수’가 개발되는 등 다양한 인간 사회의
세속적 의도들에 의해서 기술이
계속해서 발전하고 있다.
현상을 ‘아상블라주’로 이해하기
리얼이 전복되고 있는 작금의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아상블라주(Assemblage; 프랑스어: agencement; "함께 모이거나 조립된 것의 모음")라는 포스트-휴머니즘 철학적 접근 방식을 상기하자. 아상블라주는 인간뿐 아니라 사물, 서사 등을 집합적으로 사고하며 이들 사이의 사회적 복잡성 및 연결성을 환기한다. 즉 사회적 현상들은 그저 인간의 의지적 행동만이 결부된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물질적 환경과 상호적으로 의존한다는 말이다. 즉 작인(agency; 주어진 환경에서 행동할 수 있는 행위자의 능력 및 발현)의 존재론적 다양성을 기억하는 것이다.
즉, ‘리얼’이 전복되고 있는 세계를 추동시키고 있는 동력은 위에서 나열된 1), 2), 3) 의 요소들이 상호결합된 아상블라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글 제닌기
제닌기는 오늘날의 기술-사회 조건 속 예술에 대하여 연구하며 교육하고 있는 김지원과 한 몸을 쓰고 있는 예술가이다.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시간을 초월하는 물질로서 미디어를 바라보거나 현대인의 '인터넷성 정신 상태 (internet state of mind)'에 대하여 고민하는 등 예술과 기술 환경에 대한 다른 이야기들을 점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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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Ahlquist, Sean & Menges, Achim ed. Computational Design Thinking. AD Reader. 2011.
Biswajit Ray & Aleksandar Milenkovi. “True Random Number Generation Using Read Noise of Flash Memory Cells.” IEEE Transactions on Electron Devices, Vol. 65, No.3. 2018.
Phillips, S. Parametric Design: A Brief History. [online.] http://aiacc.org/wp-content/uploads/2010/10/pd.pdf. (2022년 10월 20일 접근). 2019.
Reas, Casey, McWilliams, Chandler & LUST. Form + Code. Princeton Architectural Press. 2010.
김용학, 안성모. 「패러매트릭 디자인에서의 점진적 조형특성 연구」. 『한국실내디자인학회논문집』 제27권 2호 통권127호. 2018.04.
[네이버 지식백과] 되부름 [recursion] (IT용어사전, 한국정보통신기술협회). https://terms.naver.com/entry.naver?cid=50372&docId=1914200&categoryId=50372
Star Trek 2: The Wrath of Khan (1982) - First realistic fractal landscape (HD)
https://www.youtube.com/watch?v=Tq_sSxDE32c